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다 복음서 (문단 편집) == 발견과 공개 == 1976년 [[이집트]]의 한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었으며 2006년 4월 6일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의해 복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동시에 공개되었다. [[그리스도교]]계에서 신학적인 점에서 의문이 제기되곤 했던[* 이 문제 자체가 [[뜨거운 감자]] 수준의 논쟁은 되지 않았다.] "[[예수]]는 왜 [[이스카리옷 유다]]의 배신을 방관했는가?"에 대해, 초대교회 시절 [[영지주의]]의 일부 분파가 어떠한 논리로 유다를 긍정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다. 특히 이 계열은 영지주의파 중에서도 소수였기 때문에 당시의 다양한 해석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다. 실물로 발견되기 전에도 이름은 알려져 있었다. 성 [[이레네오]] 주교가 행한 이단논박에서 "유다에 대한 기록(유다복음)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라는 식으로 언급한 기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유다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매우 대중적이었다. [[예수]]를 예언자로 생각하든 [[하느님]]으로 생각하든, 예수를 높이 받드는 사람이라면 배신자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거꾸로 "유다야말로 진정한 사도임!"이라고 주장한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거부할 것은 당연한 일. 실제로 영지주의파에서도 이쪽 계열은 세력이 매우 약한 계파로, 실제 [[영지주의]]의 기반인 [[발렌티누스]]파가 최대 계파인 시절의 일이므로 사실상 이는 기존 영지주의와도 분할되는 분파운동이다. 다수 영지주의파는 [[바오로]]의 후계를 주장했었던 정치적 입지가 있었으니, 당연히 이 주장은 묻힐 수밖에 없다. 즉, 누가 [[예수]]의 진정한 제자냐... 라는 주장을 함에 있어서 [[베드로]] vs [[바오로]]가 있는데 여기에 유다가 낀 거다. 그러니 결국 카인파라는 가상의 분파까지 만들어서 까야 했던 것이 사실, 결국.... 후대 사가들은 카인파와 [[시몬 마구스]] 역시 모작으로 보는 견해이므로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카인파가 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단지, 사료로서의 가치를 보자면 당시 로마 교구의 권한에 대해 신학적인 반론을 제기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정도가 이 서적의 가치가 될 것이다. 다만 오해와는 달리, 유다복음을 지지하던 계파가 주류 신자들의 탄압을 받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카리옷 유다]]를 호의적으로 해석하는 공동체는 [[영지주의]] 중에서도 철저한 소수였고, 이 정도의 소수 계파에 대해서 기독교는 탄압을 할 역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밀라노 칙령]]으로 공식적 박해를 중지한 때가 313년이므로, 유다복음이 집필되었다고 추정되는 시기보다 약 200년은 후의 일이다. 물론 313년에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기 전에도, 그리스도교는 이미 로마 내부에서 어느 정도 신자를 확보한 상태였고 마냥 소수 종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유다복음의 지지층을 탄압할 역량은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당시 그리스도교의 주류파는 영지주의 집단과 직접 대결하기를 극구 꺼렸는데, 지나치게 원한을 사서 영지주의자들이 공권력에 고발이라도 하면 박해가 다시 시작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고발하기보다는 자기 신자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을 쓰는 것에 집중하여, 귀한 식자층 신자가 영지주의 집단에 투신하는 일이 없도록 막는 방향으로 갔다.] 쉽게 말해서 이 계파는 탄압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